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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정보

쇼핑의 메카 '명동', 문인과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by 여.일.정.남 202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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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명동은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핫플레이스로 명성을 이어 나갔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93) 명동을 기억하는 공간들 2

해방 이후 명동은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핫플레이스로 명성을 이어 나갔다. 백화점, 호텔, 금융기관을 비롯해, 주점, 다방, 음식점 등 문인과 예술인들이 자주 모이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해방 이후 문인, 예술인들의 아지트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인들 다수는 명동을 떠났고, 이제 한국인의 차지가 되면서 명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고, 휴전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복구의 과정들이 있었다. 전쟁의 상처들이 회복되면서 명동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주점과 다방이 모여 있는 곳은 문인들의 아지트로 자리를 잡았다.

박인환의 시에 이진섭이 작곡한 불후의 명곡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있었지만’으로 시작하는 시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곳도 명동이었다. 그 시절 ‘명동에는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소설가 이봉구를 비롯해, 박인환, 오상순, 천상병, 김수영, 윤용하 등 소설가, 시인, 작곡가 등이 명동 골목 곳곳에 있던 주점과 다방을 누비면서, 이곳의 낭만을 더하게 했다.

당시 문인들이 자주 찾았던 곳은 ‘은성’으로, 현재의 국민배우 최불암의 어머님이 운영했다고 알려진다. 명동1가 옛 제일은행 본점이 있던 곳에 ‘은성주점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서 약 10m 앞에는 1960년대 소설가이자 언론인 이봉구와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임만섭 등 문화예술인들이 모였던 주점 터다. 특히 이봉구 선생은 명동을 좋아해 ‘명동시장, 명동백작(明洞伯爵)’이란 애칭으로 불렸다.”는 글에서 당시 이곳이 문인들의 아지트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은성주점 이외에도 봉선화, 쉘부르 등이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명동의 예술과 문화를 꽃피운 대표 건물은 ‘명동국립극장’이었다. 일제 강점 시기인 1934년부터 명동의 터줏대감이었던 국립극장은 1973년까지 영화관, 공연장, 예술극장 등 문화예술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75년에 사라졌다가 30년 만에 복원공사를 시작해 2009년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명동국립극장은 1975년에 사라졌다가 30년 만에 복원공사를 시작해 2009년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백화점, 명동의 랜드마크가 되다

1970년대 이후 명동은 쇼핑의 메카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그 중심에는 현대인의 품격을 보여주는 한편 소비 욕망을 자극하는 백화점이 있었다. 일제 강점 시기인 1930년대에 세워진 미쓰코시(三越)백화점 자리에 들어선 신세계백화점, 조지아(丁字屋)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도파백화점과 함께, 중앙우체국에서 명동 입구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1970년에 개점해 1992년에 폐점한 코스모스백화점이 1970~1980년대 명동 백화점의 중심 역할을 했다.

코스모스백화점은 70~80년대 종로서적과 YMCA 앞과 함께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로 자리를 잡았다. 필자가 중고시절을 보냈던 대구에서는 동성로의 대국백화점 앞이 대표적인 약속 장소였다. 1979년 12월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이 개관하면서 명동을 상징하는 백화점이 됐다.

이외에도 명동 골목 거리 중심가, 지하철 4호선 명동역이 인접한 곳에 1976년 제일백화점이 개업했다. 제일백화점은 중저가 상품을 주로 취급했다. 명동에서 을지로3가 방향으로 가는 길에 쁘렝탕백화점(현 장교빌딩)이 있었다. 쁘렝탕 백화점 주변에는 골뱅이와 노가리를 주된 안주로 내놓은 맥주집들이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켰다.

명동의 백화점들은 1980년대 이후 도심의 중심이 강남, 신촌, 잠실, 목동 쪽으로 분산되고, 롯데, 현대, 신세계 등 대형 백화점들이 들어서면서,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이 이제 명동을 지키는 양대 백화점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이 이제 명동을 지키는 양대 백화점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롯데백화점 본점 전경.

영화관의 추억들

쇼핑과 여가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명동에는 영화관들도 다수 자리를 잡았다. 1958년에 개관한 대한극장은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운드 오브 뮤직’, ‘마지막 황제’, ‘백 투 더 퓨처’ 등을 한국 최초로 개봉했다. 이 영화들을 70mm 원본 필름 그대로 상영한 대형영화 대표극장이었지만, 2024년 폐업했다.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은 서로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해, 영화 선택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 명보극장은 1957년 개관해 2008년 폐관했다. 폐관한 뒤에는 명보아트홀로 이름을 바꾸어 뮤지컬과 연극 등 무대 공연을 올리고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소재한 오페라 대표 극장 ‘스카라’에서 이름을 딴 스카라극장의 역사는 일제 강점 시기부터 시작된다. 1935년 일본인이 약초정(현재의 충무로)에 약초극장(若草劇場)을 세웠고, 해방 후인 1946년 ‘수도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2년 스카라극장(Theatre Scala)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개관을 했으나, 2005년 폐관하고 건물도 철거됐다.

명동성당 옆 저동에는 중앙극장이 있었다. 중앙극장의 역사는 1922년 일본인 오이시가 '중앙관'을 세워 1934년부터 '중앙극장'으로 변경한 것에서 시작한다. 1944년 조선악극단 출신 김상진이 인수했다가, 1952년 동양물산이 인수했고, 2007년부터 중앙시네마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2010년 폐관했다.

이외에도 1980년대에는 명동 중심부에는 재개봉관인 코리아극장 유네스코회관에 있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유네스코회관 맞은편에 명동극장이 있었고, 명동극장 별관이 코스모스백화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명동 곳곳에 있었던 영화관들은 이곳이 서울 사람들이 가장 모인 곳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1957년 개관한 명보극장은 2008년 폐관한 뒤 명보아트홀로 이름을 바꾸어 뮤지컬과 연극 등 무대 공연을 올리고 있다.

명동을 노래한 가요들

1950년대 이후부터 명동이 서울의 상징 공간으로 인식된 만큼 서울을 노래한 가요들에서도 ‘명동’은 자주 언급됐다. 1950년 현인이 발표한 ‘서울야곡’은 탱고 음악을 활용해 서울 번화가의 풍경과 그 속의 감정을 담았는데, 3절에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이라는 가사가 보인다. ‘서울야곡’은 1970년대에 가수 전영이 리메이크하면서, 명동의 밤거리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1970년 배호의 ‘비 내리는 명동 거리’는 제목에서부터 명동이 연인과의 이별의 장소임을 보여준다. ‘비 내리는 명동 거리 잊을 수 없는 그 사람/비 내리는 명동 거리 사랑에 취해 울던 밤’이라는 가사에는 애잔함이 묻어난다.

1973년 패티김이 발표한 ‘서울의 모정’은 ‘희망의 새아침이 밝아오면은’으로 노래가 시작되는데, 3절에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는 저녁/네온의 바다에서 꿈을 꾸었네/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아아 행복한 명동의 거리’라는 가사가 나온다.

1977년 혜은이가 발표한 노래 ‘서울이여 언제까지나’에도 명동이 나온다. 이 노래는 계절별 서울의 명소와 함께 서울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데 ‘눈 내리는 명동에 밤이 깊어도/사랑하는 친구야 함께 거닐자/우리들의 우정을 키워가련다/서울이여 서울이여 언제까지나’라 해, 겨울 부분에 명동이 나온다.

2025년에 작고한 가수 송대관도 ‘명동나그네’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낯선 명동거리 밤은 깊어가니/오색 불빛들이 찬란하구나/앞을 쳐다봐도 뒤를 돌아봐도/모두가 웃는얼굴 흐뭇하구나’라는 1절의 가사, 다음 2절의 가사는 ‘고향을 떠나온 지 몇 해나 되나하고/손꼽아 헤어보니 아득하구나’라고 해, 서울의 중심 명동에 자리를 잡았으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1984년 설운도의 노래 ‘나침반’에는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차라리 청량리로 떠날까요/많은 사람 오고가는 을지로에서 떠나버린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라고 해, 명동이 종로나 을지로 등과 함께 연인과 이별하는 대표적 장소로 소개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부터 명동이 서울의 상징 공간으로 인식된 만큼 서울을 노래한 가요들에서도 ‘명동’은 자주 언급됐다.

청바지와 통기타, 장발과 미니스커트

명동은 19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 등으로 기억되는 청춘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1969년에 문을 연 비어홀 오비스 캐빈(OB’s Cabin:유네스코 빌딩 뒤편 4층 건물)에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양희은 등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하면서 청춘 문화를 선도했다.

오비스 캐빈에 이어, 1970년 명동 입구에 금수강산이 생겼고, 1970년대 중반 쉘부르가 문을 열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명동 쉘부르는 이종환이 DJ, 허참이 MC로 활약했으며, 1970~1980년대 라이브 음악의 산실로 자리를 잡았다.

명동의 청춘 문화와 관련이 있는 공간 중의 하나는 현재도 명동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명동파출소다. 이곳은 1970년대 가위와 자를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던 대표적인 파출소였다. 당시 명동은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들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미니스커트의 시작은 가수 윤복희가 미국 라스베가스 무대 공연 후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이 계기가 돼, 명동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퇴폐적으로 봤고, 파출소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단속하게 했다. 가위는 머리를 자르는 도구였고, 대나무 자는 미니스커트의 길이를 재느라 필요했다.

현재 명동파출소 바닥에는 “1973~1988. 미니스커트·장발 단속 등 국가의 통제와 청년들의 자유가 충돌하던 현장”이라는 글귀를 새긴 동판이 있다. 1975년에 개봉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감독 이장호)’에도, 장발 단속에 걸린 청년이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과 함께 송창식의 ‘왜불러’가 삽입곡으로 나온다.

청춘의 추억을 명동과 함께 하신 분, 명동에서 많은 기억을 앞으로 만들어 갈 분 모두가 명동 답사에 나설 것을 권해 본다.
명동은 19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 등으로 기억되는 청춘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사진은 외국인 관광객들과 시민들로 북적이고 있는 명동 거리.

출처:서울특별시, 내 손안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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