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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정보

백제에 행운을 가져다 준 '우물'…서울 지하수에 얽힌 이야기

by 여.일.정.남 2024.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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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18) 번영의 지하수
 
백제 때의 한성인 지금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 모형

강한 나라 마한을 정복한 백제

백제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마한이라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초창기 백제인들은 마한을 더 큰 나라로 우대하며 섬겼고 백제의 임금도 마한의 임금을 더 높은 사람으로 떠받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빠르게 국력을 키워 나간 백제는 마한을 넘어설 계획을 갖고 있었다. 결국 나중에는 백제가 오히려 마한을 멸망시키고 흡수해버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략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인 서기 9년에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실린 초창기 백제 역사는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 전설이 섞여 있는 부분도 많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적어도 초창기 백제 사람들이 나라 운명을 두고 마한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6년에 백제가 웅천책이라는 요새를 건설했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마한과 전쟁이 벌어지면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곳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마한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마한왕은 백제에 외교적인 조치를 취했다. 사신을 보내 마한이 과거에 백제가 자리 잡을 때까지 도와준 일도 많고 백제가 마한을 떠받들겠다고 한 적도 많은데, 도리어 마한과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한 것이다. 마한왕이 보낸 사신은 “어찌 의리가 이러한가?”라고 따졌다고 되어 있다. 마한왕이 이렇게 지적하자 백제 내부에서도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마한왕의 사신은 선과 악, 맹세와 배신, 예의범절 같은 문제를 내세우며 백제인들 중에 마한과 대결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설득했을 것이다. 결국 백제 조정에서는 이런 상태에서 마한에 도전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서 기껏 만든 웅천책을 스스로 파괴해버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에는 영영 마한의 졸개 취급을 받으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다. 이들은 “우리가 마한과 싸워서 이기고, 마한을 정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백제 사람들 모두에게 굳게 심어줄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 요즘 같으면 마한을 이기자는 내용을 담은 영화나 만화를 만들어서 퍼뜨릴 수도 있을 것이고, 정부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국민들에게 직접 설득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백제에서는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용한 방법이 우물이었다.
북촌에 남아있는 석정보름우물. (※본문 내용과 무관한 참고용 사진)

요새도 허물었던 백제, 우물의 징조를 보고 돌아서다

마한왕의 사신 때문에 백제가 요새를 포기한 지 반년 정도가 지났을 때, 궁전에 있던 우물에서 물이 넘쳐 나는 일이 발생했다. 물은 중력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분수대를 만들거나 하지 않는다면 땅에서 물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일이 일어나기란 어렵다.

더군다나 땅속 깊이 파놓은 우물에 저절로 물이 차오르고 그것이 우물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가 되었다면 그것은 확실히 쉽게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백제 조정에서는 너무나도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일자(日者)에게 의견을 물었다. 일자는 요즘으로 치자면 점성술사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우물은 물을 마시려고 주로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에 파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나오는 물이 넘치도록 많아졌다는 말은, 더 큰 마을, 더 사람이 많은 사는 곳, 더 큰 도시의 우물처럼 우물이 스스로 변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보면 어떨까?

실제로는 일자는 “백제의 임금이 우뚝 서게 될 징조”라고 말했다. 백제 조정의 높은 사람들은 이 정도면 훌륭한 이야깃거리라고 생각했다. “백제가 마한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늘이 우물이 넘치는 이런 기적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결국 물이 넘치는 우물이 행운의 여신이 보여준 기적이나 다름 없다고 주장한 셈인 그 작전은 통했던 것 같다. 백제인들의 뜻은 하나로 뭉쳐 백제가 마한을 이긴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결국 얼마 후 백제와 마한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백제는 큰 승리를 거둔다.

그렇다면 백제와 마한이 싸울 때, 백제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그 우물은 왜 넘쳤던 것일까? 그 이유는 우물이 지하수를 활용한 시설이라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그 비는 시냇물이나 강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중 많은 양은 그냥 땅속에 스며든다. 그렇게 스며든 물은 땅속 어디 즈음인가에 머물러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하수다. 지하수는 땅속으로 스며들어 가면서 저절로 잡다한 물질들이 걸러지기도 하거니와 땅 위에서 들어올 수 있는 더러운 물질이 더 들어올 일도 없어서 물이 비교적 깨끗하다. 게다가 그 양도 풍부한 편이라서 땅 위의 강물보다는 땅속의 지하수가 그 양이 더 많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지하를 향해 우물을 파서 지하수가 그 우물에 고이게 한 뒤 그 물을 ‘우물물’이라고 부르면서 마시곤 했다.

그러므로 지하수가 많아지면 우물물도 좀 더 많아질 것이고, 지하수가 줄어들면 우물물도 더 줄어들게 된다. 만약 누가 갑자기 넓은 지역에 많은 물을 들이붓는 바람에 스며드는 물이 갑자기 많아지면 땅속에서도 지하수가 많아져 몰려다니는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겨울철 눈과 얼음 형태로 산에 물이 많이 쌓여 있었다가 봄이 되면 녹아 많은 양이 땅속으로 스며들게 되면 지하수가 많아진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이유

압력이 높아진다는 뜻인데, 이런 현상이 생기면 갑자기 많은 물이 우물에 치밀어 오르면서 우물이 넘치는 일도 가능해진다. 비가 많이 온다든가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 텐데, 또 한 가지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 바로 해빙이다.

겨울철 눈이 많이 와서 눈과 얼음 형태로 산에 물이 많이 쌓여 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봄이 되면서 그 물이 갑자기 녹아내리면 그중 많은 양은 땅속으로 스며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하수가 많아진다. 백제의 궁전은 서울에 있었을 텐데, 만약 그와는 좀 더 떨어진 곳의 산에서 많은 물이 녹아서 땅속으로 스며 들었고 그 때문에 지하수가 늘어났다면 백제 사람들은 어디에서 물이 오는지도 알 수 없는데 갑자기 우물물이 넘쳤다고 생각해서 대단히 신비롭게 여겼을 것이다. 특히 백제에 도시가 점차 커지면서 이곳저곳에 새 우물이 많이 생겨나면 이런 이상한 현상을 볼 기회도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 마침 《삼국사기》에는 우물물이 넘치는 현상이 나타난 시기가 음력 2월이라고 되어 있다. 대략 초봄 즈음이니 이런 산의 얼음과 눈이 녹는 일이 일어나기 좋은 시절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땅속 지질을 조사하고 정기적으로 지하수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어디에 어떻게 지하수가 흐르는 지를 과학의 힘으로 파악해 나가고 있다. 서울의 땅속은 크게 보면 뜨거운 마그마가 굳어서 생긴 화성암이 많은 지역과 강물에 쓸려 온 흙과 모래가 다져진 부분이 많은 충적층으로 나뉜다.

화성암이 많은 곳은 산지가 많은 북한산, 도봉산 또는 관악산 인근이고 충적층은 한강 주변에 많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서 충적층은 빗물이 바로 잘 스며들기에 지하수를 쉽게 많이 얻을 수 있는 곳일 가능성이 더 높다. 백제의 중심지는 지금의 송파구 지역이며 한강 근처라서 충적층이 많은 곳이다. 이곳에서 백제인들이 우물을 많이 개발하고 그 물을 잘 활용했다는 것도 잘 들어맞는 이야기다.

수자원공사 물정보포털의 자료를 보면, 현대 서울에는 8,000개 이상의 지하수를 파내는 곳이 서울 각지에 있어서 매년 2,000만 톤 이상의 지하수를 뽑아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2021년 서울시 자료를 보면 서울에서 가장 지하수가 파내는 곳, 즉 관정이 많은 구는 서초구로 총 1,343개의 관정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숫자가 가장 적어 95개의 관정이 있는 성동구에 비해 10배 이상에 달하는 숫자다. 이 외에는 강남구, 강동구, 송파구에 관정이 많은 편이라 공교롭게도 옛 백제의 중심지 주변에 지금도 지하수 활용 시설이 많다.
가락시장 폐정수탑이 공공미술작품 ‘비의 장막’으로 재탄생했다.

서울 곳곳에 숨어 있는 ‘지하수 활용 시설’은?

재미있게도 백제의 궁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송파구 가락시장에는 ‘비의 장막’이라고 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탑이 있다. 이 탑은 원래 가락시장에서 나오던 지하수를 활용하기 위해 물을 담아 두는 물탱크로 만들어 놓은 시설인데 높이가 32m가량이라 상당히 큰 편이고, 그 속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무려 600톤에 달한다.

그런데 이 시설을 2004년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어서 방치하고 있다가 최근에 조명 시설을 만들고 겉면을 꾸며서 커다란 예술품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32m 높이의 탑 속에 지하수 600톤을 넣어 두는 시설이라니, 우물물이 넘친 것 정도로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백제인들이 보면 깊이 감동할 만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지금 서울에는 일부러 우물을 파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지하수가 치솟아 오르는 곳도 많다. 지하철, 지하도, 건물 지하실을 비롯해서 현대에는 지하를 뚫어 가며 짓는 시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시설을 만들다 보면 굳이 우물을 뚫을 생각이 없어도 저절로 지하수가 나오는 곳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물을 ‘유출지하수’라고 하는데, 서울 곳곳에서 매일 15만 톤 이상의 물이 이렇게 흘러나온다.
지하철 유출지하수를 이용해 노면 온도를 저감시키는 ‘쿨링로드’는 폭염특보 시 하루 최대 5회 가동한다.
유출지하수는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물이라서 인근 개천에 갖다주기도 하고, 꽃을 기르거나 청소를 위해 그 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앞으로 유출지하수를 더 많이 잘 활용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로 자주 지적되곤 한다. 때문에 세종대로 등지에는 쿨링로드(클린로드)라고 해서 도로에 유출지하수를 뿌려서 미세먼지를 없애고 온도를 낮춰주면서 자동으로 도로를 씻는 장치가 길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여름철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동시키는 장치이며 다른 지역에도 설치 사례가 생기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지하수가 땅 위로 솟는 정도의 일은 그냥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세상인 셈인데, 그만큼 서울 시민들에게 행운이 많아지기를 한번 바라본다.

출처:서울특별시, 내 손안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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