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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정보

조선 최고의 영의정은 누구? 광화문 앞 '의정부 터'에 얽힌 이야기

by 여.일.정.남 2024.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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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조선시대 최고 관청이었던 ‘의정부’ 터가 ‘의정부지 역사유적광장’으로 조성해 지난 9월 12일 정식 개장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0) 의정부지 역사유적광장

서울시는 의정부 터를 1만 1천300㎡ 규모의 ‘의정부지(議政府址) 역사유적광장’으로 조성해 지난 9월 12일 정식 개장했음을 밝혔다. 의정부는 조선시대 국왕을 보좌하면서 국가 정사를 총괄하던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구로, 1400년부터 1894년까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이 근무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광화문 광장의 동편 첫 번째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선시대 의정부의 역사

의정부는 고려시대 최고의 국정 회의기구인 도평의사사의 기능을 이어받은 관청으로, 조선 건국 후에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불렸으나, 1400년 의정부라는 명칭으로 정착됐다.

조선의 헌법에 해당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에는 정1품 아문(衙門)으로 의정부에 대해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서정(庶政)을 고르게 하며, 음양을 다스리고 방국(邦國)을 경륜한다.’고 그 임무를 기록하고 있다.

정 1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각 1명을 두고, 종 1품 좌찬성, 우찬성 각 1명, 정 2품 좌참찬, 우참찬 1명, 정 4품 사인(舍人) 2명, 정 5품 검상(檢詳) 1명, 정 8품 사록(司錄) 1명을 뒀고, 이들이 기본적으로 의정부를 이끌어 간 관료였음이 나타난다.

조선전기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르는 시기에는 의정부의 기능이 강화된 의정부 서사세(署司制)의 정치 형태가 운영됐고, 태종이나 세조처럼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시기에는 6조의 판서들이 왕명을 받아 정사를 행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啟制)가 운영됐다. 조선전기에는 의정부가 국정의 최고 기구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비변사(備邊司)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의정부의 위상이 약화됐다.
의정부지 역사유적광장에서는 의정부 건물과 기타 주요 시설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 비변사의 기능을 폐지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면서 다시 국정 최고 기구가 됐다. 광화문 광장에 위치했던 의정부는 임진왜란 때 화재로 건물이 훼손됐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신정왕후)의 주도로 1865년 경복궁 중건 사업이 재개되는 과정에서 의정부 청사의 재건도 발표됐다. 당시 『고종실록』의 기록을 보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대신이 의정부를 중수하자고 청한 것을 이미 윤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오래도록 미처 거행하지 못한 일로 지금 거행하고자 한다면 대략 중수하고 말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의정부는 중요한 곳으로 중외(中外)에서 모두 우러러보는 곳인데 임진왜란 이후로 아직 영건하지 못했다. 듣건대, 그 높은 대(臺)와 화려한 주춧돌이 밭 사이에 버려져 있는데 지금 수리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당상 청사(堂上廳舍)에 불과하다고 한다. 역재의 융성하던 때 현량한 보필들이 등용되어 오가던 날을 회상하면 어찌 개연히 감흥이 일지 않겠는가? 아! 보필의 긴중함이 어떠한가? 당계(堂階)와 등위(等威)의 차이와 의문(儀文)과 절목의 사이에도 또한 지금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탄식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도(道)를 논해 나라를 경영하면서 백관을 통솔하고 기강을 떨치는 곳을 어찌 이처럼 구차하게 할 수 있겠는가? 상국(相國)이 앉아 있을 아문이 없다는 것을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해서는 안 된다. 내하(內下) 돈 2만 냥을 우선 호조에 내주어서 대신 청사(大臣聽舍)에서부터 사인(舍人)들의 중서당(中書堂)까지 아주 새롭게 중건하여 모조리 옛 모습을 회복하게 하라고 분부하라.


1865년 다시 그 위상을 회복한 의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내부(內府)로 바뀔 때까지 짧은 기간 그 이름을 되찾았다.

의정부 자리에서 일어난 변화들

광화문 육조앞길의 옛 의정부 터에 자리하고 있던 경기도청 청사의 전경
대한제국 시기인 1909년(순종 2)에는 의정부의 건물 외행랑과 내삼문을 헐고 2층 벽돌 형식의 새로운 청사를 지었음이 나타난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하고,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편되면서 의정부 건물은 경기도청 청사로 1945년 광복 때까지 사용됐다. 신축 초기 내부(內府:의정부)의 서양식 건물의 모습은 서울역사박물관의 사진 자료로도 남아 있다.

이후에는 미군청 청사로도 활용되다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기도청이 들어섰다.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될 때까지 20년간 의정부 자리에는 경기도청 청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정부 부처처의 여러 기관들이 자리를 잡았다가, 1970년 12월부터 1986년 8월까지는 내무부 치안본부가 들어섰다. 이처럼 의정부지에는 1990년대까지 여러 행정 관청이 자리했다가, 1990년 3월 이 일대에 위치했던 건물들의 완전 철거가 진행됐다.
2016년에 촬영된 의정부 터 발굴조사 현장
1997년부터 이곳은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2013년 의정부지 유적이 최초로 확인되면서, 서울시에서는 2016년부터 8년간 의정부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정비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발굴 작업의 결과 현재 정본당, 협선당, 석획당, 내행랑(內行廊), 정자 등의 건물과 연지(蓮池), 우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정본당은 삼정승의 집무 공간이며, 그 양옆으로 찬성과 참찬들이 근무하던 협선당, 재상들의 회의 장소였던 석획당이 있었다. 정본당 뒤쪽 후원에서는 연지와 정자의 흔적이 발굴돼 이곳이 의정부의 휴식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영의정들

최근 그 터가 발굴된 의정부의 책임자는 영의정이었다. 의정부에서 근무한 조선의 영의정 중에서 최고의 인물 3명을 꼽으라면 필자는 지금도 ‘대표 정승’으로 인식되는 황희(黃喜:1363~1452), 임진왜란 때 전시(戰時) 정부를 이끌어 나갔던 류성룡(柳成龍), 그리고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각 2차례씩 6번 영의정을 지냈던 이원익(李元翼:1547~1634)을 자신 있게 추천하고자 한다. 이들 3명의 영의정은 현재의 정치에도 소환하고 싶은 역량과 인품을 갖춘 인물이기 때문이다.

세종 시대의 명재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황희는 90세로 장수하면서 24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고, 이 중 19년은 영의정이었다. 87세에도 영의정을 지낸 것 역시 기록이다.

1418년 양녕대군의 폐위에 반대하다가 유배의 길을 걷던 황희가 다시 관직에 등용된 것은 세종 때인 1422년 2월이었다.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황희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조정의 신하들 또한 황희의 등용을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며 반대파들의 견해를 일축했다. 반대파까지 포용한 세종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세종의 신임을 받은 황희는 1426년 우의정에 이어 1427년 좌의정이 됐다. 1431년 69세의 나이에 영의정에 오른 뒤에도 세종은 늘 그를 곁에 두었다. 1432년 70세가 된 황희가 사직을 청했지만, 세종은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황희가 더 연로하자, 세종은 초하루와 보름에만 조회를 하도록 특전을 베풀었고, 큰일 이외에 황희를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명했다. 집에 누워서 대사(大事)를 처리해도 좋다는 지침까지 내렸다. 세종의 파격적인 대우 속에 황희는 87세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할 때까지 18년 간 재상의 자리를 지켰다.

“큰일과 큰 의논을 결정할 적엔 의심나는 것을 고찰함이 실로 시귀(蓍龜:점을 치는데 쓰는 상서로운 풀과 거북)와 같았으며, 좋은 꾀와 좋은 계획이 있을 적엔 왕에게 고함이 항상 약석(藥石:약과 침)보다 먼저 했다. 왕을 과실이 없는 처지에 있기를 기필(期必)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요란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목적을 삼았다.”는 실록의 평가에서 세종이 고령의 황희를 끝까지 신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의정부지 역사유적광장을 찾은 시민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전시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 류성룡은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고 의주로 피난을 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 놓고 또 골짜기까지 들어간다면 다시는 서울을 수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선조가 피난길을 떠난 후에는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렀다. 이후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평양성 탈환을 계획했고, 1593년 1월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했다. 1593년 10월 선조를 호가(扈駕)해 환도한 후에는 다시 영의정에 올랐고, 직업군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의 설치를 청했다.

1594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전수기의십조(戰守其宜十條:전쟁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10조목) 등을 올리면서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에도 전쟁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1598년 9월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향인 안동 하회로 돌아왔고, 이 시기에 임진왜란에 대한 반성의 기록인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했다.

이원익은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내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것도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한 정권마다 2번씩 영의정을 지냈다. 이원익은 행정력과 실무 능력과 더불어 도덕성과 청렴성을 지닌 대표적인 청백리였다. 최근에도 공직자들의 인사 청문회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는 사례가 많은데 이원익은 어떤 상황에서도 재상 지명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선조 때인 1598년 7월 좌의정에서 영의정으로 승진을 하면서 그의 이력에 첫 번째 영의정 경력을 쌓았다. 1599년 5월 영의정에 물러났다가 9월에 복직했다. 광해군의 즉위와 더불어 북인이 정국의 중심에 섰지만, 광해군의 첫 조각에서 예상을 깨고 이원익은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광해군 초반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자 이원익은 1609년 8월 20여 회 이상의 사직을 청한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1611년 9월 광해군은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으로 불러들였다. 그의 경험과 노련한 국정 경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해군과 두 번째 영의정의 이년은 짧게 끝났다. 여전히 정국은 경색됐고, 이원익은 1612년 4월 스스로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서인 정권 시대가 열렸다. 인조 정권의 첫 영의정도 이원익이었다.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된 날, “왕이 승지를 보내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던 날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아들였다.”고 『인조실록』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정파 간 대립이 날로 치열하고, 이념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 현실 때문일까? 이원익처럼 국익과 민생 문제 해결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영의정의 출현이 기다려진다.

출처:서울특별시, 내 손안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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